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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발견

영화 <심청전>을 통해 살펴보는 ‘장애인 존중’

글. 송석주 영화평론가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1925)은 조선 시대에 쓰인 동명의 한글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필름이 유실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영화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심학규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착한 심청의 이미지를 통해 효도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도리임을 설파하는 로드무비(road movie)일 것이다.

<심청전>은 장애인 영화라는 점에서도 생각해볼 부분이 많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이유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영화는 시각장애인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그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용인한다. 조금 가혹하게 말하면, 장애인을 자립 불가능한 골칫덩이로 상정하고, 산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영화다.

현대의 장애인 관객이 <심청전>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영화의 미진한 ‘장애인 감수성’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일부 영화에서 장애인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무능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심청전>의 기만성은 효의 숭고함을 알리기 위해 장애인을 문제적 인간으로 소비했다는 데 있다.

책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라며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라고 말한다. 결국 환대란 타자에 대한 융숭한 대접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 존중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위다.

과거 한국 영화에서 장애인은 대체로 환대받지 못했다. 일정 수준의 흥행을 기록한 대중영화에서 장애인은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희귀한 존재이거나(<말아톤>), 눈물을 흘리고 싶은 관객을 위해 희생당하거나(<7번방의 선물>), 성폭행을 당하는 가여운 존재로 대상화됐다(<도가니>). 비상함과 불쌍함의 양극단을 오가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이에 반해 2020년에 개봉한 <나는 보리>는 장애인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환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극악한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이들은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등에 업고, 소소한 행복에 즐거워할 줄 아는 우리의 이웃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의 ‘고통’이 아니라 장애인의 ‘삶’이다. 나는 비상함과 불쌍함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애인의 괄호 쳐진 일상이 궁금하다.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의 피아니스트나 변호사가 아닌 그저 그런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장애인들의 기쁨과 슬픔을 보고 싶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절에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 심학규는 스님과 분수에 맞지 않는 약속을 한다. 아버지의 무리한 약속으로 인해 심청은 뱃사람으로부터 공양미 삼백 석을 얻고, 스스로 인당수의 제물이 된다. 딸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을 뒤늦게 안 심학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장애인이기 때문에 불행하고, 장애인이라서 가엾다는 생각도 혐오의 일종이다. 진정한 존중은 기적적으로 눈을 뜬 심학규에게 “드디어 비장애인이 됐다.”라며 박수를 보내는 일이 아니다. 고독한 방안에서 심학규가 딸에 대해 느낄 죄책감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이며, 그가 비록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장애인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일이다.

*송석주 영화평론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전공했다. 제15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TBN ‘낭만이 있는 곳에’, ‘달리는 라디오’ 등 영화 코너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