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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서 환자로, 환자에서 의사로

내과 전문의 서연주

글. 박성혜 + 사진. 이지수

절기상 입추인 탓일까, 바람의 무게가 한결 가볍게 느껴진 날 서울 여의도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을 찾았다. 진료가 끝난 시간임에도 병원은 환자와 보호자의 여운이 맴돈다. 의사에서 환자로, 환자에서 의사로,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으로 변화의 순간을 맞은 인터뷰 주인공 서연주 씨를 만나보자.

본문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으로

그는 내과 의사이다. 그에게 찾아온 변화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9개월 동안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얼마 전에는 장애인등록증을 발급받았다.
불쑥 찾아온 변화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스스로 고민하고 꿈꿔본 미래에도, 부모가 그려본 자식의 앞날에도 찾아볼 수 없던 페이지이다. 2022년 11월 6일. 여느 때와 비슷한 일요일은 찰나의 시간을 거쳐 전혀 다른 날이 되었다. 낙마 사고가 났다. 사고가 난 강원도 인근에서 원주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부랴부랴 달려온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부터가 그가 기억하는 그날이다. 왼쪽 안구 파열과 안면부 분쇄 골절 등 여러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 사고로 왼쪽 눈 시력을 잃었다.

브레이크 고장 난 열차처럼 앞을 향해 달리던 청년 의사

환자에게 친절했고,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한국 의료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앞장설 줄 알았던 젊은 의사였다. 전공의 과정까지 마친 그는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살았다. 전공의 과정, 전공의협의회 리더, 의료계 파업 등 당시 ‘의료’라는 세계 속에서 바쁘게 뛰었다. 늘 많은 일을 맡아 할 만큼 의욕도 욕심도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공허함과 번아웃 증상도 나타났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PT(Personal Training 개인지도), 승마, 골프 등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휴식 시간, 식사 시간을 쪼개서 어떻게든 했다. 멈추지 않고 달리는, 브레이크 고장 난 열차 같았다. 서른둘, 삶의 갈림길에서 브레이크가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이런 식의 브레이크는 아니었을 테다.

환자를 진료하던 병원에 환자로 입원하기

의사 가운 대신 환자복을 입고 환자가 되었다. 평소 환자를 진료하던 일터에 입원하니 의사일 때 몰랐던 환자의 마음을, 환자가 모르던 의사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까?’ 하는 고민은 ‘당장 눈에 감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하루아침에 의사에서 환자로 그렇게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그는 마주해야 했다.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병원’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병원을 바라봐야 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몇 번의 수술과 입원을 통해 ‘의사’ 입장에서만 여겼던 병원을 ‘환자’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꽤 신선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저를 조금 더 좋은 의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니까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기다린 시간

의사라는 직업 탓일까, MZ세대여서 그런 것일까,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빨리 수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아직도 낙마 사고 경위나 현장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알아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에 매달려 시간 낭비하는 것이 싫었고, 제게 닥친 변화에 적응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였던 건 아닙니다. 다친 눈에 감염 소견으로 2차 응급 수술인 유리체 절제술을 했을때 절망과 공포를 느꼈답니다. 감염되면 나머지 눈까지 실명될 수 있어 그 부분이 절 힘들게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고 예민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변화된 삶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변화와 함께 찾아온 새로운 고민을 치열하게 하고 있습니다.”라며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그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렸다.

다시 병원으로, 새 삶을 열다

2023년 3월 의사 가운을 다시 입었다. 외부 치료가 필요하던 터라 반일 근무와 치료를 병행했고 5월부터 정상 근무 중이다. 종일 내시경실에서 환자를 만나고, 일주일에 한 시간 외래 진료하는 임상강사 2년 차의 일상을 보낸다. “한쪽 눈을 잃었을 뿐인데 제 삶의 상당한 것이 바뀌었습니다.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제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제가 이렇게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힘도 중요하지만, 누구보다 저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지켜준 가족, 친구, 교수님 등 주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라며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했다.

그가 새롭게 열어갈 페이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록될는지 궁금하다.
“사고 후 삶이 확장되었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장애인으로 삶이 확장되었고, 환자 경험으로 병원 경험을 확장했고 SNS 활동을 통해 많은 이들과 공유하며 서로 응원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30대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고 고민할 때 ‘장애’는 제게 나침판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하고 싶고, 의사로서 역할도 잘 수행하고 싶습니다. 또한 의사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예를 들면 ‘돌봄’에 관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불쑥 찾아온 변화 앞에 그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신껏 자신을 믿고, 주변 사람들의 격려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그 용기가 말이다.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평온을 비는 기도>로 마무리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