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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발견

발달장애인의 연애와 결혼

글. 정진옥 박사(되어감 성교육상담소)
발달장애인은 오랜 돌봄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호자가 평생 곁에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발달장애인이 제대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평생교육과 주거뿐 아니라 성에 대한 준비도
담보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은 성교육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연애와 결혼이
주는 희망

‘연애, 결혼’, 누군가에게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단어일 수 있다. “언젠가 나도 꼭 해보고 싶어, 아니 해 볼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고, 누구나 하는 것 같은데, 나만 하지 못할 때 엄청난 상실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 누군가 중에는 발달장애인이 있다. 지적장애나 자폐성 장애가 있는 많은 성인이 이런 불행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들도 행복하고 싶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 봐야 할 점은 ‘연애, 결혼=행복’의 공식이 반드시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다. 발달장애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연애와 결혼을 갈망하는 이유는 바로 이 공식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연애와 결혼이 무조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행복한 연애와 결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환상’이 장애인에게는 ‘꿈’이 되기도 한다.
현장에서 발달장애인을 만나는 나 역시 장애인들과 함께 이 ‘꿈’을 꾼다. 그 꿈은 나와 발달장애인들의 삶에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성취할 수는 없어도 언젠가는 꿈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의
연애와 결혼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30여 년 일해 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발달장애인과 그들의 부모를 만났고, 그들이 꿈도 꾸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발달장애인의 꿈, 그들의 기쁨과 고통의 발원지는 대부분 대인관계, 특히 이성관계이다.
보호작업장에서 30대 중반 지적장애 남성을 사귀게 된 30대 초반의 지적장애 여성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함께 일하는 보호작업장에서 만난 이 남녀는 둘 다 동료들의 이상형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 여성은 “온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여요. 일하다가 애인을 쳐다볼 때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어요.”라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겪는 경험을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작업장에 새로 들어온 20대 초반 여성과 가까이 지냈고, 그로 인해 이 여성은 낙심했다. 그래서 그런 바람둥이와는 헤어지는 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 여성은 “연애하는 게 힘들어요. 그러나 외로운 것보다는 괴로운 게 나아요. 그냥 연인관계로 있을래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지적장애인인 그녀가 대인관계에 내포된 심오한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결혼을 통해 꿈을 현실로 실현한 지적장애인(과거 등급체계에서 3급) 커플도 있다. 그들은 모두 30대 중후반으로 복지관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원했다. 양가 부모님 허락하에 결혼한 그들은 미혼인 손위 시누이의 아파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의 부부관계는 시누이가 일찍 출근하고 난 후 남편이 늦은 출근을 하기 전까지의 시간에 이루어졌다. 부부의 애정 표현은 키스, 애무, 포옹이 주를 이루었고, 성관계는 없었다. 이들의 동의를 얻은 후 성교육전문가인 나는 성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활동인지 교육했고, 앞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부에게 물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말없이 잠시 쳐다보더니 지금처럼 지내겠다며 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들이 선택한 자신들의 애정 표현 방법을 지지하고 격려해 주었다. 표현은 적지만 아내를 믿고 사랑하는 남편과 활달한 성격에 남편을 믿고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문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믿고, 배려하며, 의지하는 이 부부의 진심 어린 사랑에 나는 크게 감동했다.

물론 모든 장애인이 위 사연처럼 연애와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게 연애와 결혼이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쌍방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연애와 결혼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이 행복은 다른 모든 조건 중에서도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사랑은 관계에 있는 친밀감이며,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너’라는 존재와 나눌 때 경험하게 되는 인지적, 정서적 공감이다.
인간 삶의 희로애락은 사랑(친밀감)을 추구하는 관계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의 몸이 아닌 그 사람의 인격 전체이다. 그런데 그 인격체는 몸을 가지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친밀감이라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몸을 통해 상대방에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존재한다고 믿는 발달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정서, 감정을 인식하는 게 쉽지 않다. 이들에게 연애와 결혼, 그리고 성에 대한 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인관계에 존재하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 친밀감, 헌신, 책임 등을 가르쳐야 하는 일은 부모와 전문가에게 굉장한 도전이다. 그러나 연애와 결혼을 꿈꾸는 발달장애인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런 도전을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