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봄호 VOL.302

VOL.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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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만남

나만의
로봇 캐릭터로
세상과 소통하다 발달장애 팝아트 작가 황성제

글. 오정미 + 사진. 김생훈

황성제 작가는 발달장애를 가진 팝아트 화가다. 그의 커다란 캔버스 안에는 언제나 각양각색의 로봇들이 모여 와글와글 떠들고 있다. 말이나 글로 하는 의사 표현은 서툴지만, 그림을 통해 마음을 전하는 황성제 작가.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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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이 되는 로봇 친구들

자그마한 로봇들이 그림의 배경에 가득 들어차 있고, 커다란 로봇 하나가 그 앞에서 위용을 뽐낸다. 로봇들은 격투를 벌이기도 하고, 봄맞이 꽃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자신을 뽐내기도 하며,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도 한다.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로봇 그림들은 모두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황성제 작가의 작품들이다.
5살 때 자폐 스펙트럼 장애 3급을 진단받은 황성제 작가는 유아기부터 그림에 큰 흥미를 보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장거리 비행을 할 일이 잦았는데, 비행기 안에서 가만히 있기 힘들어하는 어린 황 작가에게 펜과 공책을 쥐여 주면 그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흰 종이 위에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황 작가의 작품 소재가 되는 것은 바로 로봇이다. 지금까지 황 작가가 창작한 로봇 캐릭터는 16,000여 개가 넘는다. 모든 캐릭터가 각기 다른 이름과 특징을 가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황성제 작가의 어머니 김금자 씨는 황 작가가 처음에는 좋아하는 게임의 캐릭터를 따라 그렸지만 이내 직접 캐릭터를 창작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성제가 중고등학생 때 종이 뭉치를 들고 다니길래 그냥 낙서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자세히 보니 앞 페이지에 로봇 이름을 쭉 써놓고 그 순서대로 캐릭터를 다 그린 거였어요. A4 한 장에 양면으로 16개씩, 32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 종이를 버리지 않고 다 모아보니 50장씩 꽉 채운 파일이 10권이 되더라고요.”
황 작가는 글이나 문장을 구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대신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건넨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로봇 캐릭터는 어느덧 황 작가의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그의 마음을 더욱 알록달록한 형태로 세상에 전달하는 중이다.

씨앗에서 싹 틔운 화가의 삶

황성제 작가는 두뇌와 손의 협응력이 뛰어나다. 머릿속에 생각한 이미지를 그대로 그려낼 수 있기에 황 작가의 손길은 거침이 없다. 하지만 재능이 있는 것과 교육을 받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김금자 씨는 황 작가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미술학원을 여럿 알아보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고 전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학생과 수업을 진행하려면 1:1 수업을 해야 하는데 학원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황성제 작가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18년, 부산기장장애인복지관(이하 ‘기장복지관’) 주최로 열린 발달장애인 아마추어 작품전을 만났을 때였다. 당시 기장복지관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지원을 받아 발달장애인에게 미술 교육을 진행하고 기획전시도 개최하는 ‘씨앗(C-ART)’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지인의 추천을 받아 전시를 보러 갔다가 기장복지관과 인연이 닿으며 황 작가도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황 작가는 기장복지관에서 아크릴 물감이나 태블릿 등을 활용한 다양한 작법을 배우며 그동안 부족했던 미술에 관한 교육 부분을 보완해 나갔고, 취미 미술이 아닌 직업 예술인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함께라서 더 용감한 ‘우리아트5’

‘우리아트5’는 황성제 작가를 포함한 5명의 발달장애 예술인들이 모인 미술자조협회다. 발달장애 예술인들의 재능을 눈여겨본 한젬마 크리에이티브디렉터가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함께 활동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했고, 김금자 씨를 비롯한 보호자들이 용기를 얻어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아트5는 국가사업 공모에 도전하거나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단체전을 기획하는 등 어엿한 예술인으로서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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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트5의 진취적인 행보는 후배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 복지관에서 함께 미술을 배우던 청소년들이 취미에 그치지 않고 우리아트5에 가입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리거나 작품 전시를 열고 싶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부산지부는 우리아트5에서 착안하여 ‘블루아트’를 발족했다. 블루아트는 예술 활동을 펼치고 싶은 발달장애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정기전도 꾸준히 개최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노력 중이다. 김금자 씨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는 그림이나 음악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처음부터 치료나 교육을 시도도 해보지 않는 보호자들이 있다며, 쉽게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적성을 찾아볼 것을 권했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에 ‘안단티노’라는 오케스트라단도 있고 사물놀이 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일반적인 친구들처럼 빨리 배우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하면 우리 아이들도 충분히 다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많이 접하고 배워 보면 좋겠어요. 함께 뭉치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더 용감해질 수 있어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친구나 학부모들과 많이 교류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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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황성제 작가는 화승코퍼레이션 소속 작가로서 고용되어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황 작가가 참여한 단체전은 무려 100회 이상이며 초대개인전도 10회 이상 진행됐다. 최근에 판매를 시작한 황제아트 아트굿즈 상품도 반응이 좋다. 황성제 작가는 다가오는 7월 또 한 번의 개인전을 통해 세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계획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림을 그린 황성제 작가는 산책과 복지관 활동 등으로 낮 시간을 보낸 뒤 저녁에는 개인 블로그에 조용히 삶을 기록하고 다시 한번 작업을 위해 붓을 잡는다. 좋아하는 일로 가득 찬 그의 하루에서 누구보다도 안온한 행복이 엿보였다. 황 작가가 앞으로도 좋아하는 일을 통해 안정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더욱 다양한 회랑에서 그의 로봇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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