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악당으로만 생각했던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중적으로 극장가에서 크게 흥행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제92회 아카데미와 제77회 골든글로브에서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워너 브라더스는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기업과 나눠서 투자했는데, 5,500만 달러(한화 약 550억 원)라는 할리우드에서는 적은 제작비로 5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전작의 흥행 성공에 따라서 2024년 속편으로 제작된 ‘조커-폴리 아 되(Folie a deux)’는 흥행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작품성도 낮게 평가받았다. 제작비는 1편보다 훨씬 많은 2억 달러가 들었다는 말도 나왔는데 말이다. 유일하게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 되기는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장애의 관점이 그 차이를 만들어 냈다.
‘조커’ 1편에서는 장애의 사회적 관점과 복지 서비스 문제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아서 플렉(Arthur Fleck)은 본래 희극 배우를 꿈꾸는 재능 있는 지망생이나 뇌신경 장애가 있어서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한다. 이에 다른 사람이 오해하게 되므로 항상 목에 메모판을 걸고 다닌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서는 고담시 복지 서비스에 따라 사회복지사와 상담해 약물을 받으면서 그 나름대로 제어한다. 하지만, 고담시가 복지 예산을 줄이면서 상담은커녕 약물도 끊긴다. 따라서 아서의 장애는 더욱 심해진다. 아무 때나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되니 불안불안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는 광대 대행업체 동료 랜달이 준 호신용 총을 품고 소아병동에서 광대 공연을 하게 된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다가 총을 떨어뜨리고 만다. 이에 바로 해고당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오르는데 여기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백인 청년 세 명이 폭행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데 순간 웃음이 터진다. 본인도 당황스럽지만, 자신들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백인 청년들은 격분해서 아서를 무자비하게 집단 폭행하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방어하려는 와중에 총을 격발하게 되고 아서는 살인자가 된다. 총을 발사하게 된 일은 잘못이지만, 만약 복지 예산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장애가 심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살인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조커 2’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조커의 제어되지 않는 웃음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의료적 치료를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웃음이 갖는 장애학적 의미와 가치를 감독이 생각지 못했을 수 있는데, 장애학적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1편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2편에서는 정신질환만 부각했기 때문이다. 2편의 부제인 프랑스어 ‘Folie a deux’는 그대로 옮기면 ‘둘의(a deux) 광기(folie)’라는 뜻인데 이를 다시 말하면, ‘공유 정신병적 장애(shared psychosis)’라고 할 수 있다. 공유 정신병은 한 사람의 망상적 신념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 다수 간에 공유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정신의학 용어다. 과거에는 감응성 정신병이라고 불렸는데 정신병이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는 것을 말한다. 즉 ‘조커’ 2편에서는 아캄 감옥에 갇혀 있는 아서와 나중에 할리 퀸이 되는 리 퀸젤의 공유 정신병 관계를 다루고 있다.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서 장애가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정신병을 공유하는 캐릭터로 등장시킬 뿐이다. 근본적으로 정신질환의 전염이라는 관점은 조커의 캐릭터가 갖는 사회적 함의를 훼손한다.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가 반복되면서 장애를 둘러싼 본질을 놓치고 말았다. 독특한 사고와 사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조커가 어떻게 범죄자들에게 이용당하는지 보여 주었다면, 조커에 관한 새로운 해석은 물론 대중적인 흥미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끝내 감독은 정신질환의 늪에 갇혀 버렸다. 내재적인 정신질환을 넘어서서 사회 역학 구조 속에서 장애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보여 주었다면, 더욱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